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플로든 전투 (문단 편집) == 플로든 전역 == 스코틀랜드 침공군과 맞설 잉글랜드 북부군 사령관은 서리 백작 토마스 하워드 경이었다. 백작의 아버지, 노퍽 공작 존 하워드는 보스워스 전투 때 리처드 3세의 편을 들어 참전했다가 전사했기에, 하워드 가문[* 후일 헨리 8세의 다섯째 왕비가 되는 [[캐서린 하워드]]의 가문으로, 서리 백작 토마스 하워드는 캐서린 하워드의 친조부였다.]은 [[튜더 왕조]]에게 단단히 찍혔다. 가주가 된 이후 헨리 7세와 헨리 8세에게 충성한 토마스 하워드는 노퍽 공작위의 복원을 꿈꾸고 있었지만, 1513년 초엽에 차남인 잉글랜드 해군 사령관 에드워드가 브레스트 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하며 헨리 8세의 침공계획을 어그러트렸다. 분노한 헨리 8세는 서리 백작을 원정군에 동참시키는 대신 북부 국경을 지키고 있으라며 북부군 사령관을 내맡겼는데, 이는 좌천성 인사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왕의 눈밖에 난 서리 백작은 패전으로 인한 문책을 두려워하여 군대를 신중하게 움직였고, 북부군 전체를 섣불리 소집하는 대신 소집 준비령만 내리고, 본인은 소수 병력과 포병 정도만 인솔하며 폰테프락트에 주둔, 제임스 4세의 의도를 관찰했다. 그래서 북부군의 초반 움직임은 윌리엄 불머 경이 이끄는 200명의 기마 장궁병 선봉대를 국경에 보내어 국지전에 대비하는 정도였다. 침공이 임박한 1513년, 국경 너머 가축을 서리하는 약탈자(Reiver)들 사이 벌어지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의 국지전은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스코틀랜드 이스트마치의 관리자(Warden), 홈 백작 알렉산더는 3천의 대병력을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 북부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8월 13일, 홈의 약탈부대는 잉글랜드의 7개 마을을 불지르고 수많은 가축 떼를 노획해 복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밀필드 평야 인근에 매복해 있던 불머의 잉글랜드 선봉대가 이들을 요격했다. [[장궁]] 세례에 놀란 약탈자들은 노획품을 내버리고 무질서하게 도주했다. 500여명이 전사했고, 백작의 동생을 포함해 400여명이 포로로 잡힌 대패였다. 분노한 제임스 4세는 원정준비를 서둘리 마쳤다. 8월 22일, 제임스 4세는 4만 2천 군대를 이끌고 콜드스트림에서 트위드강을 건너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군대의 첫 목표는 잉글랜드의 국경요새들인 노럼 성(Norham Castle)[* [[에드워드 1세]]가 처음으로 스코틀랜드 지배권을 주장한 역사적인 성이었고, 더럼 주교가 관리하는 대스코틀랜드 전선의 핵심 요충지 중 하나였다. [[로버트 1세]]도 노럼 공성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적 있었으며, 제임스 4세 본인도 예전에 노럼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난 적 있었다.]과 워크 성(Wark Castle)이었다. 도하한 스코틀랜드군은 두 부대로 나뉘어, 본대는 더 큰 노럼 성으로, 별동대는 워크 성으로 향했다. 아직 서리 백작이 잉글랜드 북부군을 소집하지 않았으므로 이들과 맞서 싸울 잉글랜드 야전군은 없었다. 전쟁은 노럼과 워크를 포위한 스코틀랜드 포병대의 포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8월 25일, 폰테프락트에 주둔하던 서리 백작은 제임스 4세의 침공소식을 전달받고는 놀라며 북부군에 소집령을 내렸다. 해외원정에서 제외된 트렌트강 북부의 잉글랜드군 병력들이 서리의 소집령을 받고 모여들었다. 서리의 장남이자 잉글랜드 함대 사령관인 [[토머스 하워드|토마스 하워드]] 휘하 수병들, 잉글랜드 변경의 약탈자들도 북부군의 기치 아래 [[뉴캐슬어폰타인|뉴캐슬]]로 모여들었다. 9월 1일 소집이 완료된 잉글랜드 북부군은 2만 5천에 달했다. 8월 28일, 심판의 날까지 버틸 수 있으리라 자랑하던 노럼 성은 스코틀랜드 포병대의 맹공에 백기를 올렸고, 스코틀랜드군은 더 작은 에탈 성(Etal Castle), 포드 성(Ford Castle)을 공격하기 위해 틸강 계곡을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다. 9월 1일, 포드 성을 함락한 제임스 4세는 더 남하하는 대신 포드 성을 사령부로 삼고 닷새간 늑장을 부렸다.[* 일설로는 성을 지키던 성주 부인 엘리자베스 헤런과 불륜하느라(...) 그랬다고도 하지만, 강력한 포병대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포병진지를 구축하느라 시간을 끌었다는 설 또한 존재하기에 단순히 멍청한 오판 치부하기엔 어려운 결정이다. 제임스 4세가 닷새 후에 포드 성을 떠날 때는 군사적 사용을 방지하기 위해 성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 또한 후자의 가설을 지지한다.] 한편, 서리 백작의 북부군은 9월 5일 스코틀랜드군과 20마일 거리인 글렌데일까지 북상하고, 행군을 잠시 멈춘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9월 9일, 서리는 전령관 토마스 홀리를 보내 제임스 4세에게 군대들끼리의 [[결투 재판|전투 재판]]을 제의하도록 했다. 구닥다리 관습이었지만, 기사도적 로망을 가진 제임스 4세에겐 안 그래도 회전을 바라던 차에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서리는 이를 통해 제임스 4세를 도발해 회전에 확실히 응하게 하려 했다. 플로든 에지에 포병진지를 구축하고 기다리던 제임스 4세는 회전 제의에 기꺼이 응하고, 9월 9일에 일전을 벌이자는 답신을 보냈다. 제임스 4세와 스코틀랜드군의 프랑스인 군사고문들은 과거 [[카스티용 전투]] 때처럼 잘 구축된 포병진지에 잉글랜드군의 정면공격을 끌어들여 격파하고자 했다. 회답을 받은 서리 백작은 북부군을 글렌데일에서 6마일 북쪽인 우울러 평야까지 진군시키고 스코틀랜드군의 남하를 기다렸지만, 곧 스코틀랜드군이 진지 뒤에서 꿈쩍도 안 할 생각이란 게 명백해졌다. 제임스 4세가 언덕 고지에 대포를 올려놓은 채 기다리고 있단 정찰보고를 받아든 서리는 당황했다. 그도 바보는 아닌지라 포병진지에 대한 정면공격은 자살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9월 9일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대치만 하거나 물러나기라도 하면 제임스가 아닌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고, 주군 헨리 8세는 하워드 가문에 더 분노할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뉴캐슬에서 북부군으로 이어진 보급로가 약탈자들에게 털리며 잉글랜드군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 9월 7일, 서리 백작은 제임스 4세한테 요새에서 기다리는 건 비겁하다며 정정당당히 밀필드 평원에서 싸우자고, 휘하 지휘관들이 모두 서명한 연명서신을 보냈지만 당연히 씹혔다. 9월 8일, 잉글랜드 진영에는 백작 따위가 왕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말이 되냐는 답장만 날라왔다. 연명서신을 보내고 분위기가 침체된 9월 7일 저녁, 잉글랜드군 장교 중 하나[* 전래에 따르면 존 헤런, 일명 헤런의 사생아. 국경에 접한 포드 성주의 사생아로 악명 높은 국경 약탈자였다.]가 스코틀랜드군을 진지에서 끌어낼 방책을 제의했다. 남쪽을 향해 대포를 포진시켜 둔 플로든 진지의 남쪽에서 정면으로 들이박는 대신, 베릭 쪽으로 퇴각하는 척하다가 크게 우회기동을 시행, 플로든 에지 북쪽에 있는 브랜스턴 언덕을 점령해서 플로든 진지의 후방을 공격하자는 계책이었다. 계책을 채택한 서리 백작은 북부군에게 즉시 행군을 지시했다. 지레 겁먹어서 북동쪽 베릭으로 전장을 이탈하는 체하는 잉글랜드군을 본 제임스 4세는 크게 만족하며, 약속된 9월 9일까지 플로든에서 기다린 후 당당히 본국에 개선하겠다고 선언했다. 종일 폭우가 내렸다. 그나마 진지를 구축해둔 스코틀랜드군은 비를 피했지만, 잉글랜드군은 찬비를 맞아가며 행군했다. 9월 9일의 이른 아침, 지난밤에는 베릭으로 가는 길에 있던 바무어에서 숙영한 잉글랜드군은 돌연 진로를 꺾어 브랜스턴으로 강행군하기 시작했다. 북부군 대부분은 에탈성 북쪽의 히튼 밀 여울목에서 도하할 수 있었지만, 다리가 필요한 포병을 틸강 너머로 도하시키기 위해서는 더 북쪽인 트위젤 다리까지 빠르게 행군해야 했다. 서리 백작은 아들 토마스 하워드에게 전위대 1만 5천과 포병을 맡겨 트위젤을 도하하게끔 했고, 자신은 후위대 1만을 이끌고 여울목에서 도하하는 경로를 택했다. 잉글랜드군은 지속되는 폭우를 맞으며 행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